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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멸망을 맞이한 인간의 군상들

by 프리시 2024. 3. 29.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줄거리

 

이미 모든 세상이 무너지고 황궁 아파트만 남은 어느 날, 영화는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 때문이든 끊임없이 다투고 목소리를 높여댑니다. 재난이 닥치기 이전의 세상에서 기준이 되었던 것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은 제로 세팅됐습니다. 그런데도 주민 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자가인지 전세인지 따져 묻고 있다니, 말 그대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더 많이 가졌고, 누가 더 나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한 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재난이 휩쓸고 간 세상의 본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람들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우선 황궁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을 내쫓는 것으로 집단 이기주의의 시작을 알립니다. 주민들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추위에 나가 죽으라는 잔인한 이기주의를 보여줍니다.

외부인들을 내쫓고, 주민들끼리 공평한 분배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외부인에게 행하는 잔인한 행태와 그를 돕는 인간적인 이들에 대한 집단이기주의적 심판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말입니다.

점차 강도를 더해가며 잔인하고 강력한 리더의 모습을 보이는 영탁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 아파트의 주민이 아닌 영탁이 진짜 영탁을 죽이고, 그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밀이 발각되면서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안전한 곳인 줄로만 알았던 황궁 아파트는 외부인들의 침입으로 순식간에 전쟁터가 됩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그간 주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만 살고자 하는 이기주의의 결말이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헐거운 인물 관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원작은 웹툰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화제작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원작을 모르던 이들까지 기대감에 부풀게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병헌과 박서준, 박보영에 이르기까지 캐스팅된 배우들의 면면만으로도 기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세상이 모두 무너진 상황에서, 아파트 한 개 동만 우뚝 살아남아, 그 주민들만이 삶의 터전을 잃지 않은 상황이라니, 그 설정만으로도 재난 극 마니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이병헌이 연기한 영탁 외에는 캐릭터들이 그리 힘있게 다가오지 못하는데, 이는 재난의 상황에 대응하는 집단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다 보니, 인물 간의 관계를 풀어내는 데는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서준과 박보영이 연기한 민성과 명화의 캐릭터도, 두 사람 간의 가치관 차이가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선에서 끝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데는 힘이 부족했다는 느낌입니다.

 

무엇이 몰입을 방해하는가?

 

극 중 인물들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싸웁니다. 내 집을 사수하려고 싸우고, 내가 먹을 것을 확보하려고 싸우고, 우리가 세운 규칙을 어기는 이들을 처단하는 데 기꺼이 동조하고 나섭니다. 이 또한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모든 과정이 어쩔 수 없지만 아프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픈 얼굴을 하게 되는 공감이 필요한 장면들일 겁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민성과 명화의 대립이나 그들이 화해하고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든지, 영탁이 고의가 아닌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그 이후의 일련의 과정이라든지, 영화 내내 부녀회장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휘두르던 금애가 아들을 잃고 오열하며 나동그라지는 모습이나, 민성의 죽음 앞에서 관객은 어찌 된 일인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는 느낌이 듭니다.

모든 영화가 그러하듯이,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에게 몰입하고 동화되어 그들의 감정에 일희일비하고, 때론 눈물을 흘리고, 때론 기뻐하는 것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뭐 굳이 이유를 생각하려다 보니, 이야기의 시작이 여느 재난영화와 달랐던 지점도 이유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보통의 재난영화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던 보통의 인물들을 보여준 뒤, 그들이 뜻하지 않은 재난을 겪게 되는 상황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뻔한 구조를 택하는 대신, 이미 재난이 벌어진 다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관객들은 등장 인물들에게 몰입할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강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관객들이 감정을 쌓을 수 있는 구간들을 주는 것이 더 친절하게 관객들을 공감과 몰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